[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출근하자마자 중앙정보부 김 용순 부장이 실무 국장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매일 이루어지던 보고가 이제는 주 2-3회 보고로 완화되어 있었다. “각하, 공화당 출범과 민정 이양을 앞두고 혁명 동지 사이에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박 임항 건설부 장관실로 이 규광, 정 진, 이 종태 등 불만 세력이 자주 모이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송 요찬, 박 창암 장군들도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국토건설단 보좌관실이나 행당동 박 준호의 집, 남산옥 등을 오가면서 사람을 모으는 것도 포착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김 종필 부장 중심의 창당 작업은 흔들림 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1월 10일, 세종로 삼영빌딩 4층에 임시 사무실을 내고 김 용태, 이 영근, 김 동환, 김 재순, 김 정렬, 서 태원 등 핵심 요원들이 모였다. 이어서 11일에는 1차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당명을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조항에서 따 온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으로 정했다. 윤 일선씨를 임시의장으로 하고, 김 종필 부장을 임시 당무회의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당의 행정을 총괄하게 되는 당무회의(黨務會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1월 16일에는 핵심 최고위원들 중에서 해병 소장 김 동하를 중장으로, 육군 준장 김 재춘을 육군 소장으로, 육군 대령 강 상욱을 육군 준장으로, 육군 대령 이 석제를 육군 준장으로, 해병 대령 오 정근을 해병 준장으로 승진 임명함과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시켰다. 다음 날 이들에게 1등근무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창당 중인 재건당을 바로잡는 다는 명목 하에 민간인 신분으로 입당 원서를 제출하였다. 지난 해 12월 23일, 워커힐에서 처음으로 최고위원들에게 공개된 (가칭) 재건당이 정치 자유화와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최고회의에서는 1962년 12월 31일자로 정당 및 사회단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던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를 폐기하고, 정당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였다. 이를 통해 명년 1월 1일부터 정치 활동을 자유화하였다. 이어서 국회의원선거법을 1월 16일에, 대통령선거법을 2월 1일에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민정으로 가는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연초부터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재개하고 민간 이양 작업에 착수하였다. 8월 정권 이양을 위해서 대통령 선거를 4월경에, 국회의원 선거를 5월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단기 4295년 1월 1일을 서기 1962년 1월 1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 혁명 정부 기간 동안에 추진할 2년짜리가 아니라 5년짜리 계획을 내세운 상태에서 걱정이 많다. 조만간 추진 주체를 민간으로 넘겨야 한다. 민정 이양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하여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원대한 중장기 국가 발전 계획을 이어가게 만들 것인가?기존 자유당, 민주당 시절의 정치인이라면 희망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다. 군사 정부 아래서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1962년 12월 22일 아침 10시.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중앙국민투표관리위원회가 보고한 국민투표 결과를 정식 접수하고 헌법 개정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위원들은 온 국민과 함께 이제 새로운 나라가 펼쳐질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승만 정권과 더불어 출범한 대한민국이 이제는 혁명 정부와 함께 전혀 새로운 국가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26일 10시에는 개정 헌법 공포식을 거행하였다. 삼부 요인과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시민회관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 갑성 국민투표관리위원장의 만세 삼창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박 병권 국방부 장관이 이번 건군 제14주년 국군의 날 행사를 계기로 6.25 참전국과 동남아 자유 우방국가인 자유중국, 말레이시아, 월남 등 17개국 40여 명의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이 내한할 것이라고 보고를 하였다. 방문단은 9월 28일에는 도착 환영 의장대 사열이 있고, 29일에는 청와대로 내각 수반실을 방문하고 이어서 유엔군사령부, 30일에는 전방 휴전선 6군단 OP와 판문점 방문, 10월 1일에는 효창운동장에서 거행되는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멜로이 가이(Meloy Jr. G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여 상원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동남아 10개 지역 순방 민간 통상 사절단 일행 10명이 김포공항에서 대북(臺北)으로 출발했다(조선일보, 1962.3.3.). 사절단은 경제부흥과 통상 진흥을 위하여 36일 동안 동남아 10개국을 돌아보면서 시장 개척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들은 종래의 수입 중점 통상 방법을 시정하고 수출입이 대등한 통상 교섭을 하는 게 목적이다. 그래서 종래에 수출한 바 없는 수산물, 특수 농작물(예, 인삼, 약재), 직물 등을 소개하기 위해 「샘풀」을 갖고 간다. 대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일본과 미국 방문 준비에 바쁘던 지난 해 11월 1일, 소련이 지하 핵실험을 시도했다는 중앙정보부 해외팀의 보고를 듣고 은근히 화가 났었다. ‘도대체 어디에 쓸려고 핵 폭탄 개발에 열을 올리나? 또 전쟁을 벌일 판인가?’중공의 모 택동도 핵 실험을 강행하려 하고, 북한 김 일성조차도 측근을 소련으로 급파해서 정보 수집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이 참에 국민을 안심시키고 대 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별 성명을 1961년 11월 2일, 발표하였다. “친애하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가뭄으로 흙먼지 풀풀 나는 여주 이천 강가 신작로를 달리면서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조선 시대에는 왜 이런 신작로를 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정조 대왕의 화성 행차도를 보더라도 그 많은 군대와 군중이 움직이는데 어째서 수레, 우마차가 한 대도 안 보일까?’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묵묵히 서 있는 길가 미루나무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해가 안 갔다.결론은 그거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내내 가난했었다. 산이 많다고 하더라도 수레를 이용해서 실어 옮길만한 쌀이나 물품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냥 말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해마다 봄이 되면 농부들은 텃밭 가꾸기에 나선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겨우내 모아 둔 인분(人糞), 똥을 똥장군에 퍼 담아 지고 나가서 밭에다 뿌리는 일이다. 상추며 쑥갓, 파, 마늘, 열무, 감자, 고구마를 잘 기르기 위해 인분을 밭 전체에 골고루 흩뿌린다. 부지런한 농부의 한 해 농사 시작이기도 하다. 겨울을 지내자마자 돋아난 냉이, 쑥은 벌써 캐어 국이며 개피떡으로 만들어 먹고 있는 중이다. 봄 철 춘궁기가 도래하면 뒷 광의 쌀독은 벌써 바닥을 드러낸다. 식구들 주린 배를 마음 아파하는 농부는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금년 초 아직은 겨울 추위가 남아있던 2월 말, 경기도 화성 지역을 지나는데 오후 5시를 넘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신작로를 끼고 있는 마을의 방앗간 앞에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뭔 일인가 싶어서 차를 멈춰 섰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물었다.“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웅성거리고 있습니까?”“방아가 또 고장이 났어요.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조씨가 발동기를 다시 돌리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방앗간 안으로 들어서니 컴컴하다. 방앗간 주인이 남포불을 켜서 벽에다 거니 조금 밝아진다. 커다란 피대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12월 14일, 제1군 사령부 창립 기념식에서 군의 민정 참여와 관련된 내 소신을 짧지만 확실하게 피력했다. 현재 군사 정부에서 요직을 담당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군으로 복귀하는 것이 적절치 않고, 향후 새로운 민간 정부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예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군사 정부 초기로부터 군 복귀를 적극 피력한 사람들은 수시로 군으로 복귀시켜 왔다. 하지만 장기간 최고회의나 정부측 고위급 기관장으로 재직했거나 하고 있는 군인들은 또 다시 군으로 복귀하여 군 장성이나 사령관직으로 복귀하는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혁명 후 지금까지 정신없이 법률과 제도, 정책을 새롭게 만들어 시행해 오고 있다. 헌법까지도 개정하여 이제는 완벽할 정도로 만들었다. 내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정치 자유화를 꾀하고 민정 이양 과정을 밟을 것이다. 1962년 12월 지금은 마치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다. 희망을 갖고 내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서쪽 인왕산 뒤편으로 사라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면서 잠시 상념에 젖어 든다. 5.16 혁명을 불러들였던 민주당 장 면 정권 당시의 국가 사회는 그야말로 카오스 혼돈 그 자체였다. 우리가 나서서 책임을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조선 시대의 양반과 상놈,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 구조는 일제 침략을 당해 국가가 망하면서 적지 않게 사라졌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제의 피지배 국민, 반 노예 상태로 전락하여 모두가 고만고만한 존재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일제 36년을 지나고 또 해방 후 십오육 년 동안에 새로운 특권층이 만들어졌다. 자유당, 민주당 정권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에 소수의 특권 지배층이 절대 다수의 빈민, 농민,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1948년 건국 후 이 승만 대통령의 유상몰수(有償沒收) 유상분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매년 정초만 되면 새로운 결심을 한다. 지난 해보다는 더 나은 신년을 맞이하려는 희망을, 적기장이나 노트에 글로 적어보곤 한다. 때로는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신년 휘호(新年揮毫)를 쓰는 때도 있다. 요즈음에는 ‘원단(元旦)’이나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는 단어가 적힌 연하장이 등장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입춘(立春)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서 대문짝에 내걸면서 복을 비는 것이 관습이다.금년 1962년은 전 국민과 함께 의욕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한 해다. 국민과 함께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국민투표로 확정된 신 헌법을 공포하고 드디어 한 숨을 돌리고 있던 1962년 12월 말, 어떤 출입 기자가 물었다. “화폐 개혁의 성패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성공했다면 관련자들에게 상을 주고 실패했다면 책임자를 처벌할 용의가 있으십니까?”당돌하게 내게 도발을 하고 나섰다. 지난 6월 9일 화폐 개혁을 선포한 뒤 한 달여 만에(7월 13일), 동결시켰던 은행 봉쇄 예금 계정을 전면적으로 해제하는 ‘긴급 금융 조치법에 의한 봉쇄 예금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발령해야만 했었다. 기업은 기업대로, 일반 국민은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내년 1963년 1월부터 정치를 자유화하고, 여름에 정권을 민정으로 이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헌법 제정이 필요하다. 벌써 7월로 들어서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이 석제 법사위원장을 불러서 빠른 시일 내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토록 지시하였다. 7월 10일자로 내각 수반에 김 현철, 경제기획원장관 김 유택, 상공부 장관 유 창순을 임명하였다. 지난 번에 발효한 화폐개혁 조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송 요찬 수반과 천 병규 재무부 장관이 사표를 낸 이래 내가 맡아 오던 내각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적격 판정에 대한 최종 결과 발표에 즈음하여 간단하게 담화문을 냈다(1962.5.30.). “… 여기에 적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여 이후에 있어서는 일층 적극적으로 혁명 대업에 참여할 것이며, 또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이제라도 적극 국가에 봉사하여 다시 적격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할 것입니다. 특히 적격 판정 불신청자에 대하여는 양심적이거나 또한 앞으로 국가재건에 기여 공헌하는 사람들을 다시 검토하여 적격 판정을 내리도록 할 것입니다…”정치
[내외뉴스통신] 정이 이 대 희현 단계에서 정치를 정화하는 첫 단추는 부적절한 기존 정치인을 가려내 격리 또는 도태시키는 일이다. 이런 정치인들이 우리 정치계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한 희망이 없다. 지난 해방 후 16년간 이런 무능력하고 구태 의연한 정치인들은 언필칭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서 뒤로는 자기 일신상의 영달과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정쟁에만 몰두하면서 온갖 불법과 부정을 자행하여 왔다. 이들은 민주라는 이름 하에 중립주의나 사회주의에 영합함으로서 국가의 정체성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국가의 기강과 사회의 질서를 파